신들러 리스트(1994)
- 평점
- 9.1 (2019.01.24 개봉)
- 감독
- 스티븐 스필버그
- 출연
- 리암 니슨, 벤 킹슬리, 랄프 파인즈, 캐롤라인 구달, 조나단 사갈, 엠베스 데이비츠, 말고스카 게벨, 쉬무엘 레비, 마크 이바니어, 베아트리체 매콜라, 안드레이 세윈, 프리드리히 폰 던, 노버트 와이저, 요헨 니켈
1. 줄거리
: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39년의 어느 날, 독일군 점령지인 폴란드의 크라코프에 독일인 사업가 오스카 쉰들러가 찾아온다. 폴란드계 유태인이 경영하는 그릇 공장을 인수하기 위해서다. 수용소에 들어온 유태인을 노동자로 쓰면 인건비 한 푼 안 들이고 큰 돈을 벌 수 있다는 약삭빠른 생각에 크라코프를 찾은 것이다. 쉰들러는 이런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나치당에 가입하고, 여자, 술, 담배 등의 뇌물로 SS 요원들을 매수한다. (중략) 쉰들러는 유태인 회계사인 이작 슈텐의 도움을 받으며 일을 진행시킨다. 애초에 그가 이곳에 온 것은 돈을 벌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매일 같이 눈앞에서 벌어지는 유태인에 대한 독일군의 만행을 보면서 양심의 가책을 느끼기 시작한다. 독일군 중에서 가장 악명 높은 사람은 아몬 괴트이다. 쉰들러는 필요에 의해서 아몬 괴트와 가까이 지내지만 그의 만행을 보고 경악을 금치 못하곤 한다. (중략)
1943년 3월 13일, 아몬 괴트는 7백 년 동안 이어져 내려온 크라코프의 유태인 마을을 말끔히 청소해 버리는 거사를 감행했는데, 영화에는 독일군에 의해 게토가 쑥대밭이 되는 장면이 자세히 나온다. 학살은 아침부터 시작되었다. 유태인들은 독일군을 피해 온갖 기기묘묘한 장소에 몸을 숨기지만 독일군들은 이런 유태인들을 용케도 찾아내 무자비하게 죽인다. 사방에서 총소리가 들리고, 비명이 난무한다. 필사적으로 숨어있는 유태인들을 샅샅이 찾아내 하나씩 죽인다. 쉰들러는 말을 타고 언덕에 올라왔다가 이 야만적인 살육의 현장을 보고 경악한다. 결국 쉰들러는 유태인을 수용소로부터 구해내기로 결심한다. 그는 군수품 공장에서 일할 노동자가 필요하다는 명분으로 독일군 장교에게 뇌물을 주고, 독일 점령지인 크라코프에 있는 유태인들을 자신의 고향으로 빼돌린다. 이때 독일군에게 군수품 공장에 필요한 노동자들의 명단을 제시하는데, 이것이 바로 유명한 ‘쉰들러 리스트’이다. 쉰들러는 1,100명의 유태인을 죽음의 수용소에서 구해냈다. 그가 세운 군수품 공장은 7개월 동안 아무것도 생산하지 않은 채 종전을 맞는다. 그 기간 동안 쉰들러는 독일군 장교를 매수하고, 유태인들을 먹여 살리느라 가진 재산을 모두 날린다.
1945년 전쟁이 끝나고, 유태인들은 자유의 몸이 된다. 반면에 나치당원이었던 쉰들러는 이제 연합군에게 체포당할지 모르는 위험에 처하게 된다. 유태인들과 이별하기 전, 그는 더 많은 유태인을 살려내지 못한 것에 대해 후회한다. 그러자 이작 슈텐은 “한 사람을 구하는 것이 곧 세계를 구하는 것이다”라는 탈무드의 격언으로 그를 위로한다. 영화는 지금은 백발의 노인이 된 쉰들러 리스트의 실제 인물들이 쉰들러의 무덤에 차례로 참배하는 장면으로 끝난다.
2. 원작과 영화
1) 원작: 토머스 케닐리의 쉰들러의 방주
내용 | 『쉰들러의 방주』는 작가 토머스 케닐리와 “쉰들러 생존자” 중 한 명인 레오폴트 페퍼베르크와의 만남을 묘사한 “쪽지”로 시작한다. 이 만남이 케닐리로 하여금 “식도락가이자 투기꾼, 매력적인 인간”이었던 오스카 쉰들러에 대한 소설을 쓰게 한 계기가 되었다. 산업가이자 나치당원이었던 쉰들러는 나치 점령하의 폴란드에서 유태인들을 구하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건다. |
평가 | “무엇이 SS(나치 친위대)를 끌어안을 수 있겠는가?” 동시에 케닐리는 홀로코스트를 둘러싼 논란—단순히 쉰들러의 묘사가 얼마나 “진실”한가 뿐만 아니라 누가 홀로코스트를 증언할 자격이 있는가, 홀로코스트의 현실을 기념할 수 있는 문학적 형식은 무엇인가 등—속으로 자기 나름대로 파고 들어간다. 1993년 스티븐 스필버그의 오스카상 수상작인 <쉰들러 리스트>는 이러한 논란을 뒷받침해주었다. 특히 스필버그의 영화는 소위 “홀로코스트 붐” 속에서 (그때껏 비판적인 관점에서 문제 제기되지는 않았으나. 심각한 문제점을 안고 있던) 케닐리의 내러티브가 갖는 감상주의를 굴절하여 보여준다. 바로 한 인간의 삶을 통한 역사의 소설적 묘사이다. |
2) 영화: 스티븐 스필버그의 쉰들러 리스트
감독 | |
평가 | 제작 연출을 맡은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은 나치들의 잔인한 광기에 희생당한 유대인들의 이야기를 객관적이며 사실적으로 그려냈다. 출연자 모두 폴란드와 이스라엘의 무명배우들로, 장소도 실화의 현장인 크라쿠프에서 실제 그때의 공장을 사용해 촬영한 흑백영화이다. 1993년 제66회 아카데미시상식에서 작품상, 감독상 등 7개 부문에서 수상하였다. |
3. 영화 속 키워드 정리
크라쿠프 | 폴란드에 남부에 있는 도시, 영화에서 주 활동지로 폴란드 게토로 활용된 도시인듯 크라쿠프에 있다가 근처에 오시비엥침(아우슈비츠) 수용소로 강제 이송해 유대인을 학살함 플라조프라(프와쇼프)는 수용소도 존재함 (영화 중 이자크 스테른이 간 곳이자 아몬 괴트가 관리하는 ) 영화에서는 게토 a: 공무원, 주노동자/ 게토 b: 잉여 노동력, 노약자로 구분해서 운영 |
유대인 평의회 | 영화에서 24명의 유대인으로 구성되어 유대인의 불만사항을 접수하고 나치 독일의 명령을 전달하는 기구로 나옴 * 바르샤바 게토의 행정을 담당한 ‘유대인 평의회(Judenrat)’는 허울뿐인 자치기구에 불과 바르샤바 게토와 유대인 저항 운동에 대한 기사 > https://kookbang.dema.mil.kr/newsWeb/m/20210722/1/BBSMSTR_000000100102/view.do?nav=0&nav2=0 |
헤이그 평화 회의 | 영화에서 이자크 스턴이 지금 독일이 하는 행동이 헤이그 평화 회의를 위반하고 있다고 언급 * 의의: 1899년과 1907년에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2세(Nikolai II Aleksandrovich, 1868~1918)의 발의에 의해 네덜란드의 헤이그에서 열린 2회의 국제회의를 가리킨다. 평화를 확보하는 방법의 연구를 우선적인 목적으로 하였기 때문에 평화회의라고 한다. * 1차: ‘국제분쟁의 평화적 처리협약’ 외에 ‘육전의 법 및 관습에 관한 협약’과 ‘1864년 8월 22일 제네바조약의 원칙을 해전에 응용한 조약’의 3조약과 경기구(輕氣球)에서의 ‘폭발물 투하금지선언’, ‘독가스사용금지선언’, ‘덤덤탄 금지선언’의 3가지의 선언이 채택 * 2차: 제1회 평화회의의 ‘국제분쟁의 평화적 처리협약’의 개정과 새롭게 ‘계약상의 채무회수를 위한 병력사용의 제한에 관한 조약’의 채택, 후자에 대해서는 제1회 평화회의에서 체결된 상기 2조약의 개정 외에 새롭게 ‘개전(開戰)에 관한 조약’, ‘육전에 있어서 중립국 및 중립인의 권리와 의무에 관한 협약’, ‘자동촉발 해저수뢰의 부설에 관한 조약’, ’전시 해군력을 갖는 폭격에 관한 조약’, ‘해전에 있어서 중립국의 권리의무에 관한 협약’, ‘개전에 있어서 적의 상선(商船) 취급에 관한 조약’, ‘해전에 있어서 포획권 행사의 제한에 관한 조약’ 및 ‘국제포획심검소의 설립에 관한 조약’(미발효)(→국제포획심검소)의 9조약과 ‘경기구(輕氣球)에서 의 폭발물 투하금지선언’이 채택 |
유대인 차별 정책 | 홀로코스트 정리 부분에 후술 |
게토 | 홀로코스트 정리 부분에 후술 |
유대인 경찰 (카포) |
영화 중 폴덱 페퍼베르그의 친구들이 유대인 경찰에 지원해 활동하는 모습을 보임 * 독일군은 유대인 경찰에게 게토의 치안을 맡겨 동족들끼리 서로 감시하고 불신하도록 만들었다. https://kookbang.dema.mil.kr/newsWeb/m/20210722/1/BBSMSTR_000000100102/view.do?nav=0&nav2=0 |
오스카 신들러의 법랑철기 공장 |
크라쿠프 도심 가운데에 위치, 후반에 나오는 아몬 괴트의 플라스조프(프와쇼프) 수용소가 옆에 있다 |
프와슈프 | 1942년 6월 폴란드의 아우슈비츠 부근에 세워진 집단 수용소 영화에선 1944년 프와슈프 수용소 다 소각하고 이송계획에 따라 남겨진 유대인을 아우슈비츠로 이송 |
헝가리, 유고슬라비아 등 언급 | 2차세계대전 전선의 확장으로 추가적으로 정복된 국가에 있는 유대인들이 대거 체포, 이송됨 |
랍비 | 영화 중 공장의 유대인 노동자들에게 영적인 지도와 위로를 제공하는 장면 등장 * 유대교의 율법교사에 대한 경칭 |
야드바솀 위원회 (야드바솀 홀로코스트 박물관) |
영화 중 야드바솀 위원회에서 오스카 신들러의 공훈을 인정해 '의인'으로 선 * 아무래도 야드 바솀 홀로코스트 박물관 조직 위원회인 거 같다. 정식 명칭은 홀로코스트역사박물관이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스에 희생된 600만 명의 유대인을 추모하기 위해 세운 박물관으로, 원래는 1953년 야드 바솀(Yad Vashem) 기념관으로 건립되었다. 야드 바솀은 희생된 사람들의 '이름을 기억하라'는 뜻이다. |
신들러유덴 | 쉰들러가 구해준 유대인, 쉰들러의 유대인 |
4. 등장인물
오스카 신들러 | 오스카 쉰들러(Oskar Schindler, 1908~1974)는 독일계 체코인으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인 스비타비(Svitavy, 현 체코 모라비아) 지방에서 농기계 생산업자의 아들로 태어났다. 제1차 세계 대전이 벌어진 뒤 스비타비는 체코슬로바키아의 영토가 됐으나, 쉰들러 일가는 16세기에 빈에서 모라비아로 이주한 독일-오스트리아계였기 때문에 그는 자신을 독일인으로 여기고 있었다. 쉰들러는 실업학교를 졸업하고 브륀리츠의 기계 제작 전문학교에서 몇 학기를 공부했다. 이후 군대에 입대해 18개월 동안 복무했다. 18세부터 그는 아버지의 회사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이 회사가 경제위기 과정에서 파산하고 나서 쉰들러는 1930년 브륀리츠의 한 회사에서 판매담당자로 근무했다. 1927년(19세), 한 살 많은 부유한 농장 경영자인 요제프 펠츨의 딸인 에밀리 펠츨(1907~2001)을 만났고 이듬해 결혼했다. 슬하에 1남 1녀를 두었다. 1935년, 체코슬로바키아 내 독일계 민족주의 조직인 '주데텐 독일인 당(Sudetendeutsche Partei)'에 가입, 활동하면서 독일 국방부 첩보부와 접촉해 간첩이 돼 체코슬로바키아의 철도 정보를 독일 측에 누설했다. 이 혐의로 체코 당국에 체포돼 사형 선고를 받았으나, 때마침 1938년에 체결된 뮌헨 협정에 따라 체코슬로바키아의 영토였던 주데텐란트가 독일에 합병되면서 사형은 면할 수 있었다. |
에밀리 신들러 | 1907년 10월 22일 체코슬로바키아에서 태어났다. 20세 때인 1928년 독일의 사업가 오스카 신들러(Oscar Schindler)와 결혼하였다. 1939년 9월 나치스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하자 오스카는 나치스에 협력해 많은 돈을 번 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 이른바 '신들러 리스트'를 작성하고 전재산을 바쳐 1,200명에 달하는 유대인들을 나치스로부터 구해냈다. 에밀리 역시 남편과 함께 이들을 구해내는 데 일조하였다. |
이차크 스턴 | 폴란드계 유대인 회계사, 신들러의 회사를 운영하며 나중에는 신들러 리스트를 함께 작성하는 인물 |
아몬 괴트 | 아몬 괴트는 실존 인물로 1942년 6월 폴란드의 아우슈비츠 부근에 세워진 푸아쇼프 집단 수용소의 소장이었다. 신장 192cm, 체중 120kg의 거구였던 아몬 괴트는 수용소 소장으로 일하던 시절, 매일 아침 숙소의 발코니에서 밑에서 일하는 유태인을 총으로 쏘아 죽이는 것으로 하루 일과를 시작하곤 했다. 살인의 동기는 늘 단순한 것이었다. 식탁에 차려진 수프가 충분히 따뜻하지 않다는 이유로, 아니면 걸음을 늦게 걷거나 일하다가 잠시 동작을 멈추었다는 이유로 사람을 죽였다. 한 명이 탈출하면 같은 방에 있는 사람들을 모두 죽이거나 아니면 하나 걸러 하나씩, 혹은 다섯 명에 한 사람씩 죽이곤 했다. 이렇게 온갖 명분으로 직접 쏘아 죽인 유태인이 500명이 넘었는데, 죽인 다음 그 시체를 자신의 애완견 롤프와 랄프에게 먹도록 했다고 한다. 사람들은 이렇게 잔인한 그를 ‘크라코프의 살인자’라고 불렀다. |
5. 역사적 사실
1) 유대인이란?
보통 헤브라이인·이스라엘인이라고 부른다. BC 10세기경 이스라엘왕국이 북쪽 이스라엘왕국과 남쪽 유다왕국으로 갈리고, 바빌론유수기를 거쳐 고향으로 돌아온 이스라엘인을 모두 유대인이라 불렀고, 스스로 이스라엘인이라고 불렀다.
디아스포라(離散)로 자손은 세계 각지로 유랑하여, 그 땅의 인종·민족과 혼교(混交)를 거듭하여 왔기 때문에 형질·문화·종교는 다종 다양하다. 다시 말해, 형질상 다수의 유대인은 백인이지만 일부는 흑인(인도의 Black Jews)이며, 흔히 유대코라고 불리는 갈고리 모양의 코도 지배적인 특징은 아니다.
2) 유대인 박해의 역사 (서양사 강좌 648p)
4세기 | -배경: 로마 제국의 국교로 기독교 공인 -유럽에서는 유대인에 대해 '예수 그리스도를 죽게 한 자'라는 원한을 가짐 |
중세 | -자신들의 종교의식에 필요한 피를 얻기 위해 기독교도 어린이를 살해한다는 소문 -영국, 프랑스, 독일, 에스파냐, 이탈리아, 보헤미아의 유대인들은 기독교로 개종하라는 압박을 받거나 추방당함 -십자군전쟁 혹은 흑사병의 유행 때도 유대인은 '내부의 적'이거나 '흑사병을 퍼뜨린' 죄로 학살당함 |
19세기 | -기존의 종교적 반유대주의 > '과학적', 생물학적, 인종적 반유대주의 -악마 > 기생충 |
3) 파시즘의 대두와 몰락 (서양사개론 549 ~ , 서양사 강좌 622 ~ 647p)
대두 | -유래: 독일 노동당의 후신으로 1920년에 출범한 독일민족사회주의노동당의 명칭에서 유래, 이 정당의 이념인 '민족주의(Nationalsozialismus)'를 축약하여 나타내는 표현 -배경: 경제적 붕괴(대공황)와 독일의 정치적 불능 상태(사회보장정책을 축소하는 데 반대한 사회민주주의자들과 균형 재정을 요구한 보수적 중도 정당들이 대립하면서 중도 연립 정부는 좌초하고 의회정치가 난항을 겪음) -갈색셔츠와 팔에 갈고리 십자 완장을 한 나치스의 행동부대 SA(Sturmabteilung: 폭풍부대) 조직 -뮌헨 폭동(1923) > 실패 |
확산 | -대공황 이전: 베르사유 체제에 대한 독일 국민의 증오심에 불을 지피며 정치활동 전개 > 그러나 소수파 운동 -대공황 이후: 합법(의회), 비합법(거리) 공간 모두에서 급부상 > 괴벨스, 리펜트로프 합류, 흑색 셔츠의 전위대 SS(Schutzstaffel: 방위군단) 조직하고 히믈러 임명 -SS: SA보다 상위, '순수한 혈통'의 소유자만 대원으로 임명, 게슈타포로 알려진 나치의 비밀경찰의 핵심분자 -히틀러 유겐트 조직: 열 살 이전에 청소년들을 소속시켜 강력한 계율 속에서 군대식 생활을 통해 국가에 대한 충성을 강요받음, 사회주의자-반전주의자들을 찾아내 고발하는 역할을 |
전개 | -정점: 히틀러의 총리취임 (1933년 1월 30일) -주장: 독일인들의 "민족 공동체(Volsgemeinschaft)"를 내세우면서, "인종적 복지국가"를 약속, 아리안족의 '생활권'을 확보하고 재무장 정책을 실행함으로써 대공황을 극복할 수 있다고 선전, 대재벌-공산주의 배격, 사유재산제 옹호, 베르사유조약 폐기 주장 -국내 정책: 수권법(정부의 독재권과 바이마르헌법의 기능정지 규정) 통과, 공산당과 사민당 불법화, 가톨릭중앙당의 활동 금지, 게슈타포 조직해 개인의 서신교환-전화도청-사생활 조사(1933), 나치스의 노동전선 결 -대외 정책: 독일의 국제 연맹 탈퇴(1933), 비무장지대인 라인란트에 군대 진주(1936), 에스파냐 내전(1936)에 파시즘 세력 후원, 이-독-일 3국 방공 협정 체결해 추축국 동맹 완성(1937), 오스트리아 합병(1938), 뮌헨협정(1938) 체결 후 체코슬로바키아 점령(1939), 폴란드 회랑 지대 요구, 독-소 불가침 조약 체결(1939), 폴란드 기습 침공(1939) |
몰락 | -원인: 독일의 소련 침공(1941), 일본의 진주만 기습 공격(1941) -전개: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독일군의 패배(1942), 노르망디 상륙작전(1944) -종전: 무솔리니 사망, 히틀러의 자살, 일본의 무조건 항복 (1945) |
4) 홀로코스트 (서양사 강좌 648 ~ 664p)
개념과 이유 | -개념: 나치 독일의 유대인 대학살 -일차적인 이유: 히틀러를 비롯한 나치 수뇌부의 극단적 반유대주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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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 차별과 사회적 분리 (1933년 1월 30일 ~ 1939년) |
차별 | -1933년 3월: 나치 돌격대의 폭력시위(유대인 상점에 몰려가 낙서, 유리창 부심), 일부 지역에서는 법원 건물 포위, 유대인 판검사와 변호사 몰아냄 -4월: 나치 지도부가 유대인 상점에 대한 불매운동 시작, 일부 지역에서 유대인 판검사에게 휴직 강요, 프로이센 정부는 유대인 변호사의 자발적 휴업 권고 -직업공무원재건법(1933): '비아리아인'을 퇴직시킨다는 조항을 포함 > 5천명의 유대인 공직자 해식, 유대인 의사는 의료보험공단에서 탈퇴할 것 강요받음, 유대인 변호사의 면허 취소, 유대인의 군 복무 금지, 언론인-이사-지사장 등 해직 -뉘른베르크법(=독일의 혈통 및 명예 보호법, 1935): 유대인과 독일인 사이의 통혼과 혼외정사 금지, 유대인이 45세 이하의 독일인 여성을 가사 노동자로 고용하는 것 금지, 유대인의 독일 국기 사용 금지, 조부모 중 한 사람이라도 유대인이면 그를 유대인으로 간주, -제국국적법(1935): "독일 혈통 혹은 그와 연관된 자"만이 독일 국민이 될 수 있다고 규정, 유대인의 시민권 박탈 -유대인을 식별할 수 있게 특별한 이름을 갖게 하고, 다비드의 황색별을 박은 완장을 차야함 |
약탈 | -유대인의 재산 강탈 -아리아화: 독일인들의 유대인 사업체 인수 > 유대인의 점포나 기업을 낮은 가격으로 매각하도록 강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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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외 이주 | -유대인들에게 독일을 떠나도록 압박하는 것 -제국 수정의 밤(1938): 선전부 장관 괴벨스의 선동에 따라 독일 전역에서 유대인에 대한 최대의 폭력사태 발생 > 아리아화와 국외 이주를 더욱 촉진하는 계기: 유대인에게 일체의 자영업 금지, '아리아화'되지 않은 모든 유대인 기업의 매각 혹은 폐업, 1938년 11월~1940년 여름까지 20만 명의 유대인의 국외 이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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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기: 추방과 강제 이송 (1939년 9월 ~ 1941년 6월) |
원인 | 1939년 9월 제2차 세계대전의 발발, 폴란드 점령 |
폴란드 게토 |
-유대인들을 주변 농촌에서 도시로 집중시키고 도시 내에서는 비유대인과 격리하기 위함, 어딘가에서 추방된 유대인들과 다시 어딘가로 이송될 유대인들을 수용하기 위해 임시로 만든 거주 지구 -차별에서 절멸로 나아가는 과도기적 국면을 상징 -1939~1940년에 폴란드, 체코, 독일의 유대인들이 총독령 폴란드로 대거 추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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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제 추방 | -1940년 5월 프랑스 점령으로 프랑스 식민지인 마다가스카르 섬으로 강제 추방할 가능성이 열렸으나 대서양 제해권이 없어서 계획 무산 | |
후기: 절멸과 최종해결 (1941년 6월 ~ 1945년 5월 8일) |
계기 | 1941년 6월 독일의 소련 침공 |
재래식 방법 |
-소련 침공 과정에서 전진하는 독일 정규군 바로 뒤를 따라간 '친위특공대'에 의해 수행 -친위특공대: 나치당 친위대 보안국과 게슈타포 경찰관 3천명으로 구성된 기동 학살 부대 -학살 방식: 구덩이 앞에 줄지어 무릎을 꿇게 하고 뒤통수를 조준 사격 -주된 지역: 발트 3국 및 소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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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적 학살 |
-가스에 의한 학살: 직접 사살에 비해 '인간적'인 방식, 희생자가 아닌 가해자(학살 집행자)에게 더 '인간적'인, 양심의 가책과 스트레스를 덜 느끼게 하는 방식 -가스차: 밀봉된 화물 트럭에 수십명의 유대인을 죽이고 인근 숲으로 이동해 구덩이에 시체를 묻음, 헤움노 수용소(최초의 절멸 수용소)에서 주로한 방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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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제회의 (1942) |
-1월 20일 중앙 차원에서 전 유럽 유대인의 절멸 결정 -유대인 문제의 최종 해결을 결의 -이후 폴란드 지역에 절멸수용소(학살 전용수용소)들 잇달아 설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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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용소 | -베우제츠 수용소, 소비부르 수용소, 트레블링카 수용소, 아우슈비츠 수용소, 루블린-마이다네크 수용소 등 -홀로코스트 희생자 600만 명 중 285만 명 이상의 유대인들이 수용소에서 사망 -기차로 이송된 유대인을 선별과정을 거쳐 '죽을 자'로 분류된 경우 탈의실에서 옷을 벗고 귀중품을 맡기고 샤워실로 위장된 가스실에서 사망 > 구덩이에 묻거나 소각장에서 태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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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국의 상황 | 폴란드(300만), 소련(70-110만), 헝가리(55만), 루마니아(27만), 체코슬로바키아(26만), 독일과 리투아니아(13-14만), 네덜란드(10만), 프랑스(7만 5천), 라트비아(7만), 유고슬라비아와 그리스(6만), 오스트리아(5만), 벨기에(2만 4천) > 서유럽보단 동유럽에서 적극적으로 수행됐고, 현지 자체의 반유대주의 전통이 강했음을 알 수 있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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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벌 | 독일, 오스트리아 -뉘른베르크 재판(1945~1946): 나치 독일의 최고위급 인물들 처벌, 평화파괴죄-전쟁범죄-반인륜범죄 등 적용 -미군정이 단독으로 1949년까지 나치의 주요 인사들 처벌, 또한 각국에서도 판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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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에 점령당한 나라들 -전쟁범죄보다는 나치 독일에 대한 협력을 문제로 대규모의 재판과 처벌이 이뤄짐 |
6. 비슷한 사례
백장미단 (세계사 금성 교과서 195p) |
-뮌헨 대학의 대학생이었던 한스 숄과 조피 숄 남매를 중심으로 이루어진 이 반전 평화 운동은, 나치의 탄압으로 주요 인물들이 모두 사형되면서 끝남 -원래는 히틀러 유겐트(나치가 운영한 청소년 단체)에 가입했으나 군대식 훈련, 전시 근로 봉사 등 명령 -의대생이었던 한스가 우연히 나치의 T-4 계획에 대한 사실, 장애인을 가스실로 보내 안락사시킨다는 계획을 듣고 나치에 저항하기로 결심 -방식: '히틀러를 타도하라!'라는 낙서를 대학 광장에 남긴 것, 우리는 파시즘과 전쟁에 저항해야 한다는 내용이 담긴 전단을 몰래 뿌림 |
니콜라스 윈턴 | 유대인 부모님 밑에서 태어나 젊은 시절 증권 중개인으로 활동했다. 1930년대 히틀러의 군대가 체코슬로바키아를 침공했을 당시 윈턴은 잠시 프라하를 방문 중이었다. 유대인이 억압받는 광경을 목격한 윈턴은 유대인 아이들을 피난시키기로 결심하고 런던으로 돌아가 자원봉사팀을 꾸렸다. 윈턴은 1939년 열차편을 구해 프라하에 있는 아이들을 영국으로 대피시켰다. 이후 윈턴은 위탁가정을 모집해 아이들을 맡기고, 영국 정부를 설득해 아이들의 난민 신청 허가를 받아냈다. 윈턴은 총 8차례에 걸쳐 기차 편으로 669명의 아이들을 구출했다. 윈턴은 우연히 당시의 기록을 남긴 스크랩북을 발견한 아내의 권유로 50년이 지나서야 당시의 일을 세상에 알렸다. 2003년 엘리자베스 여왕은 인류애를 실천한 윈턴에게 기사 작위를 하사했으며, 체코공화국은 국가 최대 영예인 흰사자 훈장을 수여했다. |
라울 발렌베리 | 유럽 최대 재벌가(발렌베리가)의 일원인 라울은 미국 미시간대를 졸업하고 36년 귀국, 가족 계열사가 아닌 무역회사와 수출금융회사에 취업해 근무하던 중 2차대전을 맞이했다. 알려진 바 16분의 1 유대인 혈통을 지닌 그는 전시 영국 선전영화 등을 보며 유대인 문제에 깊은 우려와 관심을 품고 있었다고 한다. 44년 유럽 전선에서 밀리던 나치는 헝가리 유대인 약 22만 명의 멸절수용소 수송작전에 박차를 가했다. 라울은 WRB 스톡홀름 지부장이던 미국인 이버 올슨(Iver Olson)에게 발탁돼 유대인 구출작전에 투입됐다. 44년 7월 9일 부다페스트에 부임한 그는 그해 말까지 WRB 자금으로 영사관 인근 건물 32채를 임대, 부설 도서관과 연구소 등 간판을 걸고 유대인 최대 약 1만명을 수용해 보호했고, 다수에게 임시 여권을 발급해 제3국 탈출을 도왔다. 영사 신분증과 막강한 가문의 힘을 동원해 나치를 매수하고 협박도 불사했다고 한다. 그렇게 구한 유대인이, 이스라엘 홀로코스트기념관 ‘야드 바셈’ 자료에 따르면 약 4,500명. |
덴마크 (서양사 강좌 659p) |
덴마크 정부는 독일군에 점령당한 상태임에도 유대인 문제에 대해서는 비협조적이었고, 1943년 8월 점령 당국이 덴마크 군대를 해산하고 비상사태를 선포한 뒤에는 정부 관리들이 독일의 강제 이송 계획에 대한 정보를 유대교회에 미리 알려줌으로써 유대인들에게 피신할 시간을 주었다. 그리하여 1943년 10월 내내 덴마크 유대인 대부분이 배를 타고 중립국 스웨덴으로 피신할 수 있었다. 이 대규모의 구조 작업에 덴마크 각계각층의 시민이 참여했다. |
7. 해석 혹은 평가
죽기 전에 꼭 봐야 할 영화 1001편 (2005. 9. 15., 스티븐 제이 슈나이더) |
특히 의미심장한 것은 각기 다른 정서적 특징들이 각기 다른 촬영스타일과 짝을 이루는 점이다. 쉰들러라는 인물을 효과적으로 표현한 리암 니슨은 나치에 대한 우리의 심리적 연계를 형성하고, 그의 회계사이자 오른팔이며 침묵을 지키고 있는 양심으로서 유대인 킹슬리는 우리를 폴란드 유대인들과 심정적으로 연결시킨다. 실화의 흥미로운 몇 가지 요소들이 스필버그의 경건하고 가부장적인 대본과 어울리지 않는다는 이유로 제외된 것은 다소 왜곡을 초래하기도 했다. 이를테면 쉰들러의 아내 에밀리가 그와 재결합한 후 남편이 모라비아에서 가짜 군수공장을 세우는 동안 유대인들의 목숨을 구하는 일에서 맡았던 중요한 역할이라든지, 쉰들러가 계속 여자들을 바꿔가며 아내를 배신했던 점 등이다. 또 유대인들이 쉰들러의 리스트에 올라 살아남기 위해 필요했던 뇌물의 문제를 스필버그가 어떻게 받아들였는지도 알 수 없다. 그러나 이런 종류의 소재들까지 다루었다면 영화는 윤리적 복합성은 획득했을지 모르지만 그 단호하고 직접적인 힘은 상당히 훼손되었을 것이다. |
국방 일보: 이정현 문학평론가 | 미국에 이주한 유대인들이 홀로코스트에 줄곧 침묵하다가 1967년 아랍-이스라엘 전쟁(6일 전쟁)에서 이스라엘이 승리하자 갑자기 홀로코스트의 기억을 신화로 만들었다. “언제든 다시 홀로코스트를 당할지도 모를 고립무원의 피해자 집단”의 이미지로 이스라엘을 미화시키는 과정에서 이스라엘이 아랍인들에게 행사한 폭력은 희석되었다. 폭력의 피해자는 쉽게 가해자로 변모한다. 가해자들은 자신이 겪었던 고통을 쉽게 면죄부로 삼는다. 가자 지구에서 팔레스타인을 탄압하는 이스라엘 국방군의 모습은 과거 유대인들을 핍박했던 독일군 친위대의 모습과 그리 다르지 않다. 이 데칼코마니적인 풍경의 저변에는 “나는 상처받았으므로 (타인에게) 상처를 줄 수 있다”는 합리화가 존재한다. 전쟁의 폭력이 낳은 기이하고 슬픈 아이러니다. |
매일 경제: 김유태 기자 | 원작 <쉰들러의 방주>는 좀 더 깊은 논의를 진행하면서 저 ‘인간이란 무엇인가’란 질문에 답하는데, 나치 장교들 중에서도 자살하는 이들이 많았다는 실제 사실을 강조하기도 합니다. 스스로 악마가 되길 거부하며 목숨을 끊은, 선량한 부역자들 말이지요. 제목의 ‘리스트(list)’와 관련해서도 잠시 고민이 필요합니다. 우선 ‘쉰들러의 리스트’란 쉰들러가 스테른과 함께 구해낸 유대인 이름의 전체 명단을 뜻합니다. 그러나 소설은 이 제목이 중의적으로 표현됩니다. 나치의 패배로 전쟁이 끝나자 쉰들러는 나치 부역 혐의로 도망자 신세가 됩니다. 유대인들은 훗날 쉰들러가 검거됐을 때 실은 그가 유대인 수천 명을 살렸다는 문서를 만들고 전원(全員)이 서명합니다. 따라서 ‘쉰들러 리스트’는 쉰들러가 구출한 유대인의 명단이면서 동시에 ‘쉰들러를 살리기 위해’ 유대인들이 서명한 명단도 됩니다. 육체는 사라지지만 인간은 남습니다. 저 리스트에 담긴 마음을 압축하는 오직 하나의 단어가 있다면 그것은 인류애가 아닐까요. |
영화 속 클래식 | 영화에서 독일군 장교가 연주하는 [영국 모음곡] 2번의 [전주곡]은 하프시코드 특유의 객관적 성격을 보여준다. 일정한 음형의 연속과 반복으로 이루어진 음악. 바로 옆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잔인하게 학살을 당하는데, 바흐의 음악은 애절한 멜로디 하나 없이 형식과 구성의 논리로만 전개된다. 그 무심함이 처절한 비명보다 더 끔찍하다. |
8. 감상평
명장면(명대사) | ① 처음에는 이차크 스턴을 이용하려고 구했다면, 나중에는 진심으로 이차크 스턴을 구하지 못해서 미안하다고 사과하는 신들러 ② 빨간 코트를 입은 소녀와 그를 쳐다보는 신들러 ③ 무더위에 기차에 갇힌 유대인들에게 목 마를까 물을 뿌려주는 신들러 ④ 신들러 리스트를 작성하는 장면에서부터 종전 후 나치 당원으로서 쫓길 오스카 신들러를 위해 유대인들이 직접 작성한 리스트와 반지를 건내주는 장면 (마지막 10분) |
장면 연출 | ① 컬러로 시작해 나치 독일의 유대인 차별 정책이 시작되자, 흑백으로 바뀌고 나중에 오스카 신들러에 의해 살아남은 유대인들이 해방을 맞이하며 다시 컬러 화면으로 돌아오는 연출 ② 1939년부터 순차적으로 유대인에 대해 어떤 정책을 행했는지 알 수 있어서 좋았음 ③ 트리거?: 빨간 코트 입은 소녀가 2번 등장하는데 그때마다 오스카 신들러가 그 모습을 보고 유대인에 대한 태도가 변화함 ④ 신들러는 밝고 즐거운 파티장에서 키스하고 술 마시며 파티하는데 맨 지하층에서는 아몬 괴트에게 맞는 헬렌의 모습이 교차 편집된 부분 ⑤ 배우와 실제 인물이 나란히 오스카 신들러 묘비에 돌을 놓는 장면 ⑥ 나치 독일인의 삶과 유대인의 삶의 간극 |
인물의 태도 변화 | ① 쉰들러: 처음엔 유대인의 공장과 값싼 노동력을 얻어서 사업만 하려 했는데, 점점 유대인의 처지와 생명에 관심을 갖게 되어 하나둘씩 자신의 공장으로 빼돌리더니 나중엔 자신의 온 재산을 털어 유대인을 살리려고 노력함 ② 아몬 괴트: 쉰들러를 동경하는 듯,, 쉰들러처럼 유대인에게 위엄있어 보이게 행동하려 하지만 그러지 못함, 유대인인 헬렌을 좋아하지만 그러면 안된다는 마음과 좋아하는 마음 사이에서 갈등을 겪고 헬렌을 폭행함, 마지막까지 헬렌을 데리고 있으려고 했으나 결국 돈을 받고 넘겨줌.. 제일 감정 표현이 섬세하게 다뤄진 인물같음 |
교훈 | ① 악의 평범성: 한나 아렌트가 제시한 개념으로 독일의 나치스 친위대였던 아이히만의 변론을 통해 제시, 공직자로서 당시 독일의 법과 정부의 명령을 따랐을 뿐 자신은 잘못이 없다는 아이히만처럼 유대인을 죽이는데 앞장섰던 나치스와 그에 협력했던 많은 국가들의 주장은 결국 나치에 따랐을 뿐 우린 죄가 없다는 말들 ② 선의 다양성: 그런 절체절명의 순간에서도 오스카 신들러, 니콜라스 윈턴, 백장미단, 라울 발렌베리, 폴란드의 어느 간호사 등등 작던 크던 자신의 소신대로 사람을 살리는 데 힘을 썼다는 점 ③ 역사의 반복성: 나치 독일에 의해 차별과 학살을 당했던 유대인은 현재에 이르러 팔레스타인을 향해 제노사이드를 행하는 아이러니함.. |
팔레스타인 -이스라엘 분쟁 (1948~) (세계사 비상 교과서 181p) (세계사 미래엔 교과서 197p) |
① 발단: 제1차 세계 대전에 오스만 제국이 독일 편으로 참전하자, 영국은 오스만 제국의 지배를 받던 아랍인의 협조를 얻고자 하였다. 영국 외교관 맥마흔은 아랍인 지도자에게전후 아랍 민족의 독립과 아랍 국가 건설을 약속하였다(후사인-맥마흔 협정, 1915). 그러나 2년 후 영국의 외무 장관 밸푸어는 유대인 금융 자산가 로스차일드에게서 전쟁 자금을 빌리기 위해 팔레스타인에 유대인 국가를 건설하는 것을 지지하겠다고 약속했다(밸푸어 선언, 1917). 밸푸어 선언이 알려지자 유럽 각지의 유대인들은 유대인 국가 건설을 주장하며 팔레스타인 이주 운동을 벌였다. 그 결과 1948년에 유대인이 팔레스타인에 이스라엘을 건국하고 이곳에 살던 아랍인을 추방하였다. ② 전개: 서아시아의 팔레스타인 지역에서는 아랍계 이슬람교도와 유대인 간 영토 분쟁이 종교와 인종 갈등으로 확대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팔레스타인 지역에 이스라엘이 건국되면서 팔레스타인인은 삶의 터전을 잃어버렸다. 팔레스타인에 거주하던 아랍인은 팔레스타인 해방 기구(PLO)를 창설하고 무장 투쟁을 전개하였다. 1994년에는 이스라엘과 평화 협상을 체결하고 팔레스타인 자치 정부를 수립하였으나, 양측의 대립은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